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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신지식인협회 작성일18-08-31 09:26 조회17,73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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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한 박사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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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기업의 대표자라는 것은 단지 기업의 경제적 이익추구에만 일익을 감당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 기업을 일으키고 성장시키며 유지하기 위해 그리고 사회의 이익을 염두에 두고 기업의 가장 윗사람으로서의

본을 보이며 구성원의 지도자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책임이 있는 자리인 것이다. 그러나 나라를 대표하리만큼 기업의

총수가 세금 탈루, 관세법 위반, 공금횡령 등 갖가지 법을 어긴 혐의로 구속되어 옥고를 치르는가 하면 심지어 총수의

가족들이 직원과 하청업체에게 갑질과 폭행을 일삼다 사회적 비난을 받는 사례까지 속출하고 있다.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를 실천하는 재벌을 보기 원하는 것은 기업의 구성원뿐만 아니라 모든

국민들의 바람인 것이 현실이다. 이미 작고한 고 유일한(柳一韓)박사의 일대기를 엿보며 기업인들이 지향해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어떠한 자세로 기업을 경영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평양에서 태어난 유일한 박사는 상인이었던 아버지 유기연과 어머니 김확실(김기복) 사에 9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다.

 

 그는 미국에서 학비를 벌며 힘겹게 학업을 마치고 전자회사 사원을 잠시 거쳐 1922년 숙주나물 취급회사인 라초이식품

주식회사를 설립, 3년 동안 50여만 달러라는 큰 수익을 올렸다. 그리고 1926년 12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유한양행을

설립했다.

 

 그는 사회적으로 해가 되는 일은 기업에 아무리 큰 이익이 되더라도 주저 없이 제안을 거절했다. 일제강점기 당시 만주에서

헤로인, 모르핀, 아편이나 암페타민 계열인 마약류의 거래가 많았는데 이를 보고 영업담당이었던 전항섭은 유일한 박사에게

유한양행도 마약류를 판매할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그는 민족에 해가 될 것이라며 일언지하에 거절했고, 전항섭은 그 즉시

해고당할 뻔했지만 사죄한 뒤, 간신히 영업 담당에 머물게 된 이 일화는 많이 알려져 있다.

 

 광복 후, 그는 미국에서 돌아와 유한양행을 재정비한 후, 성장을 거듭하여 우수약품생산업체로서의 자리를 견고히 했으며

자신의 이익에 앞서 기업의 안녕을 추구한 기업가로서의 여러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로 종업원지주제를 실시했을 뿐만 아니라 1969년 기업의 제일선에서 은퇴를 선언하고 혈연관계가 전혀

없는 조권순에게 사장직을 물려주어 기업의 전문경영인 등용의 길을 열었는데 당시 재계에서는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한편, 아들 유일선과 동생 유특한(유유제약 창업자)은 회사에서 퇴직한 후 유일한 박사를 상대로 ‘퇴직금 반환 소송’을 해서

큰 이슈가 되기도 했다. 본인들이 받은 퇴직금이 너무 많다며 회사에 전액 반환소송을 건 일이었다. 이 때문에 이 소송을 맡은

판사가 “세상에 이런 집안이 어디 있나?”라고 아연실색했다는 후문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기업경영 일선에 있는 기업인들은 고 유일한 박사의 이야기를 통해서 요즘 시대에 필요한 애국애족이 곁들여진

기업경영철학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첫째, ‘정직’을 경영 철학으로 삼았다. 1928년 7월 유한양행의 첫 신문광고는 그의 정직한 기업경영철학이 그대로 담겨 있다.

 

 당시에는 대부분의 제약회사들이 타사제품 비방과 만병통치약인 것처럼 허위광고를 일삼았지만 유한양행은 이름과 용도, 의학

박사와 약제사의 이름을 실어 제품의 신뢰도를 증명했다.

 

 둘째,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본을 보였다. 그는 생을 마감하면서 “손녀에게는 대학 졸업 시까지 학자금으로 1만 불을 주고,

딸에게는 유한공고 안에 있는 묘소와 주변 땅 5천 평을 물려주며, 그 땅을 유한동산으로 꾸미고, 그 동산에는 학생들이 마음대로

드나들도록 하라. 또 내 명의의 주식은 전부 한국 사회 및 교육 기금에 기증하고, 아내는 딸이 잘 돌보아주기 바라며 아들에게는

대학까지 졸업시켰으니 앞으로는 자립하여 살아가거라”는 짧은 유언을 기록으로 남겼다. 자신의 모든 소유를 자식들에게 대물림

하지 않고 사회에 고스란히 환원한 것이다.

 

 셋째, 나라를 사랑한 독립운동가이자 기업인이었다. 그는 독립군을 기르기 위해 만든 헤이스팅스 소년병 학교에 입학하고 주경

야독하며 학교에 다녔다. 또한 3.1 운동 직후 서재필이 소집한 제1차 한인의회에 참여하는 등 독립운동에 큰 관심을 가졌다. 유학

생으로 젊은 시절을 미국에서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언제나 조국에 대한 사항이 있었다. “나라 사랑을 위해서는 목숨을

바칠 것을 신성한 말로 서약하여야 한다”는 자신의 말을 몸소 실천하며 기업경영에도 이를 투영하여 많은 기업인들의 모범이 되

기도 하였다.

 

 따라서 기업의 이익은 첫째, 기업을 키워 일자리를 만들고, 둘째는 정직하게 납세하며, 셋째는 남은 이익을 기업을 키워 준 사회

에 환원한다는 기본적인 기업인의 자세를 보여준 유일한 박사는 정성껏 좋은 상품을 만들어 국가와 동포에 봉사하고 정직, 성실

하고 양심적인 인재를 양성, 배출하는 데 힘을 쏟고, 남은 이익을 사회에 환원하는데 주저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줬다.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 민족과 사회를 위해 기업인으로, 교육가로, 사회사업가로, 독립운동가로 시대의 필요를 채우

기 위해 나라에 헌신한 참된 리더, 그의 정신이 필요한 요즘이다. 

 

<이창호칼럼 / 기사입력: 2018/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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